"과학기술 강국 대한민국!"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최근 스페인 스키마고 랩에서 발표한 기관 랭킹에서 국내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네이처 인덱스에서 IBS(21위), KIST(40위) 등 4곳이 100위 안에 들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썩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스키마고 랩의 연구기관 순위 내용을 살펴보고,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제가 생각하는 원인 3가지를 말씀드려보려 합니다.
전 세계 연구기관 순위
스페인 스키마고 랩의 전 세계 연구기관의 순위를 조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스키마고 랩 랭킹은 논문 인용 수와 저널의 영향력을 함께 반영하여 신뢰도가 높은 평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 2위는 중국의 연구기관이 차지했고, 그 뒤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연구기관이 상위권에 위치했습니다. 반면, 국내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전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등 부진한 성적을 보였습니다. 국내 기관 중 KIST가 111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고, 100~200위 내에 5개 기관이 있었습니다.
-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111위
- 한국생명공학연구원 147위
- 한국화학연구원 148위
- 한국전자통신연구원 187위
- 기초과학연구원(IBS) 188위
한국 과학기술, 혁신이 사라진 이유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저는 그 이유를 짧은 연구 주기와 성과 중심주의, 관리 중심의 연구 시스템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내용인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짧은 연구 주기
출연연의 주요 사업은 1년 단위로 계획과 실적을 보고해야 합니다. 물론, 계속사업 개념으로 연구를 지속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해에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예산 삭감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매년 작성해야 하는 실적 보고서와 평가를 위한 서류 작업은 연구하기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잡아먹는 요인이 됩니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연구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눈앞의 성과를 내기 위해 단기적인 연구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이죠. 마치 "모래 위에 성 쌓기"와 같습니다.
2. 성과 중심주의
현재의 평가 시스템은 연구의 질적인 측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논문 수, 특허 출원 건수 등 정량적 지표는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게다가, 연구의 질적인 측면을 판단할 기준 자체도 모호합니다. 어떤 연구를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최재천 교수님의 개미 연구처럼 당장 눈에 띄는 성과는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연구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더불어, 부실한 평가 시스템도 문제입니다. 1년 동안의 연구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는 줄 아십니까? 외부에서 온 평가위원들이 평가 당일 실적 보고서를 검토합니다. 궁금한 사항은 10~20분 정도의 짧은 면담을 통해 질의합니다. 그리고는 점수를 매깁니다. 세상에 이 많은 연구를 전부 평가할 수 있는 위원이 과연 있을까요?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잣대로 주관적인 평가를 하지는 않을까요? 다양한 연구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을까요?
3. 관리 중심 시스템
정부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닙니다. 모든 연구자들이 제대로 성실하게 연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연구비를 유용하거나 불필요한 연구장비를 구매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관리'를 철저히 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몇 연구자들의 비리를 핑계 삼아 규제를 강화하고 연구자들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건 연구자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연구자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율성을 보장해야 창의적인 연구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대한민국을 이끌 혁신을 기대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혁신을 위한 제언: 과학기술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위해서는 과학기술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 현장에서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정작 예산을 집행하는 곳까지는 가닿지 않는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장기적인 투자와 지원: 정부는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장기적인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 연구자 자율성 보장: 연구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 질적 평가 중심으로 전환: 정량적 평가에서 벗어나 질적 평가 중심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 연구자 중심의 지원 시스템 구축: 연구자들이 마음껏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이번에 나온 국제 랭킹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간 악화된 연구환경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죠. 이 와중에도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몇몇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혁신적인 연구 성과를 원하나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진짜 연구자'에게 제대로 된 지원과 예우를 해줘야 합니다. 낡은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과학기술 정책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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